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경궁 홍씨 (문단 편집) === [[음모론]] === [[이덕일]]이나 그 일파인 [[이주한]] 같은 사람 때문에 '무고한 [[사도세자]]에게 누명을 씌운 [[여자]]'라는 [[이미지]]가 퍼졌었다. [[이덕일]]이 활동하기 수십 년 전부터 혜경궁 홍씨가 [[악녀]]로 나온건 [[1980년대]] [[드라마]] 《[[조선왕조 오백년]]》에도 있지만 [[이덕일]]은 [[역사학]] 박사였다는게 문제로[* [[붕당 정치|당쟁]]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[[사도세자]]의 [[죽음]]은 아버지 [[영조]]와의 갈등과 [[정신병|정신질환]]으로 추측되는 [[사도세자]]의 기이한 행동에 [[붕당 정치|당쟁]]을 포함한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 때문에 [[비극]]을 맞이했던 것이지 순전히 [[붕당 정치|당쟁]]의 결과물인 것은 아니다.] 제대로 근거가 없거나 날조된 것이라는 것이다. [[이덕일]]은 혜경궁 홍씨를 '[[사도세자|남편]]을 [[죽음]]으로 몰고 간 악처'라면서 사도세자의 [[정신병]] 서술을 조작이라 설명하는데 [[사도세자]]의 [[정신병]]은 《[[한중록]]》 말고도 증거가 많다.[* 게다가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[[사도세자]]가 친[[소론]]이거나 [[노론]]에게 비판적이지는 않았고 [[사도세자]]의 [[죽음]] 역시 [[붕당 정치|당쟁]]보다는 [[영조]]의 의중이 적용되었던 것이라는 증거들도 속속히 나오고 있다.] 또한 [[이덕일]]은 혜경궁 홍씨가 [[영조]]와 [[사도세자]]의 관계를 조작하기 위해 [[거짓말]]을 했다며 다음을 증거로 하였다. 혜경궁 홍씨는 《[[한중록]]》에 [[사도세자]]가 22살이 되도록 [[영조]]가 능행할 때 1번도 수가(隨駕, 임금의 어가를 모시고 따라 다님)하지 못했다고 기록했지만 부자 간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의도적으로 꾸민 [[거짓말]]에 불과하다. [[사도세자|세자]]는 그 전에 여러차례 [[영조]]를 수가해 능행에 다녀왔는데 혜경궁 홍씨가 처음이라고 [[1756년|주장했던 해]]보다 4년 앞선 [[1752년]](영조 28년) 7월, [[종묘|태묘]](太廟, 종묘)에 거동할 때 수가했으며 [[1752년]](영조 28년) 12월, 태실에 나아갈 때와 [[1753년]](영조 29년) 첫날, 태묘에 나아갈 때도 따라갔다. [[이덕일]]은 '태묘'라는 [[단어]]에 '태조의 묘'라고 설명까지 달아놓았는데 태묘는 [[무덤]]이 아니며 '[[종묘]]의 정전(正殿)'을 말하는 것이다. 이건 굳이 [[정병설]] 같은 [[전문가]]까지 갈 필요도 없이 [[국어사전]]에서 [[https://ko.dict.naver.com/#/entry/koko/84c781c78d3743e1a599c0d206041947|해당 뜻]]만 보면 알 수 있는데 [[국어사전]]에 있는 단어도 명확히 확인하지 않고 1차 사료를 부정했다. 이에 대해 [[이덕일]] 본인은 《사도세자가 꿈꾼 나라》 서문을 통해 이미 《이덕일의 여인열전》에서 '태묘'의 뜻을 바로 풀어썼다며 "사소한 실수 하나로 [[작가]]를 매장시키지 말라"고 반박했다. [[이주한]]은 한 술 더 떠서 혜경궁 홍씨를 [[가해자]]로 기본 전제해서 논리를 전개한 적이 있다. 혜경궁 홍씨를 '''‘남편을 누명씌워 죽인 [[가해자]]’'''로 전제해놓고 [[이덕일]]의 사료 왜곡에 반박했던 정병설은 중요한 [[살인]] 사건에 대해 [[가해자]]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[[논리적 오류/비형식적 오류#s-1.3.3|반사실적 가정의 오류]]를 범했다.[* [[이주한]],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, 2011년, pp.39~40 「3장 비판 아닌 비판을 비판하다」] 그러나 정작 정병설은 그러한 논거를 쓴 적 없고 "[[사도세자]]가 [[정신병|정신질환]]이 있다는건 <[[한중록]]>에만 있는 사실이 아니다. 영조가 사도세자 무덤에 두려고 직접 쓴 묘지 이름, 사도세자가 장인 [[홍봉한]]에게 보낸 간찰, 정조가 사돈 [[김조순]]에게 한말 등(후략)"라고 여러 사료와 [[교차검증]]하여 이덕일을 반박했다. 이건 [[논리적 오류/비형식적 오류#s-1.3.8|관련 논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오류]]를 써서 상대의 논거를 날조한 것이다. 일단 혜경궁 홍씨를 무조건 믿을 수는 없는데 혜경궁 홍씨가 거짓말을 했다는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료는 [[저자]]의 주관에 따라 편향성이나 왜곡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. 특히 <[[한중록]]>은 그 특성상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[[홍봉한]] 집안의 책임을 실제보다 작게 묘사했다는 의혹을 피하기 힘들며 정병설도 《[[한중록]]》을 완벽히 믿지 않는다.[* 어디까지나 [[사도세자]]의 정신병 기록은 《[[한중록]]》에만 있지 않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.] 사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는 모든 [[학자]]들이 가져야만 하는 기본적인 태도이다.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그 가능성을 넘어서 딱히 고의적인 날조를 했다는 정황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이덕일과 그 부류의 인물들은 제대로 증거도 없이 의심을 넘어 확신을 하며 [[유사역사학]] 방법을 동원하는게 문제이다. 모순적이게도 [[음모론|음모론자]]들은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즉위한 뒤 혜경궁 홍씨에게 극진한 [[효도]]를 다했음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. [[음모론]]대로라면 혜경궁 홍씨는 [[정조(조선)|정조]]에게는 '훌륭한 [[사도세자|아버지]]를 [[정신병자]]로 모함해 죽인 원수이자 [[정적]]'인데도 왜 [[정조(조선)|정조]]는 친모에게 하소연조차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.[* 물론 당연히 생각해보면 [[정조(조선)|정조]]에게 혜경궁 홍씨는 [[어머니|생모]]이기에 대놓고 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는 하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